총자산 4조3750억 엔(약 56조원), 도쿄증권거래소 시가총액 8위. 손정의(54) 소프트뱅크 사장이 창업 30년 만에 이룩한 성과다.
1981년 9월 손 사장이 아르바이트생 두 명을 데리고 출발한 소프트뱅크는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소니·파나소닉·히타치·닛산 등 쟁쟁한 일본 대기업들을 잇따라 눌렀다. 최근 1년간 주가 상승률은 44.2%로 도쿄 증시에 상장된 대기업(시가총액 3000억 엔 이상) 중 1위에 올랐다. 손 사장은 최근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100억 엔(약 1280억원)의 개인 재산을 한꺼번에 기부하며 ‘감동의 경영’을 보여줬다. 그는 현재 트위터를 통해 105만 명의 팔로어와 대화하며 ‘소통의 경영’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올 2월 3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린 소프트뱅크 기업설명회(IR). 연단에서 경영실적을 보고하던 손 사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난 설명회에선 ‘X+X=X’라는 ‘승리의 방정식’을 말씀드렸습니다. 스마트폰 1위와 스마트패드 1위를 통해 모바일 인터넷 1위 기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선 제2부에 해당하는 ‘진짜 승리의 방정식’을 발표하겠습니다. 모바일 인터넷 1위와 아시아 인터넷 1위를 차지해 결국 세계 인터넷 1위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 소프트뱅크의 경영실적을 살펴보면 매출은 견조하게 성장하면서 수익성이 크게 좋아졌다. 이 회사의 연결 기준 매출액은 지난해 4~12월 2조2499억 엔으로 전년 동기 대비 10%, 영업이익은 4821억 엔으로 31%나 늘어났다.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일본에 들여와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친 게 주효했다. 주가는 지난해 4월 2200엔 수준에서 지난달 4일 3450엔까지 수직 상승했다. 이후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주가가 한때 2800엔대까지 떨어졌으나 8일에는 3400엔으로 회복했다.
소프트뱅크 그룹의 사업구조는 한국으로 치면 SK텔레콤·KT 같은 통신회사와 네이버·다음 같은 인터넷 포털업체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 소프트뱅크는 그룹 전체의 경영을 관장하는 사업 지주회사다. 자회사인 소프트뱅크모바일을 통한 이동통신 사업을 주력(매출 비중 64.5%)으로 하면서 인터넷 포털(야후재팬, 9.2%)·일반전화(소프트뱅크텔레콤, 9.9%)·초고속 인터넷망(소프트뱅크BB, 6.2%) 등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다. 이 밖에 소프트웨어와 컴퓨터 주변기기 유통사업, 프로야구단(후쿠오카 소프트뱅크호크스)도 운영하고 있다.
손 사장은 “지난해 4~12월 이통통신 가입자 순증 규모는 252만 명으로 경쟁사(NTT도코모 113만 명, KDDI 66만 명)를 압도했다”며 “반면 해지율은 0.91%(지난해 4분기)로 사상 최저를 기록해 고객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2010회계연도(지난해 4월~올 3월) 영업이익 전망치를 당초 5000억 엔에서 6000억 엔으로 상향 조정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소프트뱅크의 이동통신 가입자는 2440만 명에 달했다.
손 사장의 야망은 단지 일본 시장에서 1위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부터 아시아를 제패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중국 인터넷 시장에 대한 투자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소프트뱅크는 ▶기업 간(B2B) 전자상거래(알리바바) ▶인터넷 쇼핑몰(타오바오) ▶온라인 지불결제(알리페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렌렌) ▶할인쿠폰 공동구매(누오미) ▶인터넷 방송(PPLive) 등에 잇따라 투자했다.
1년 주가상승률 44%로 도쿄 증시 1위
2009년 말 트위터를 시작한 손 사장(@masason)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이 트위터”라고 말할 정도로 열심이다. 9일 오후 현재 손 사장의 트위터 팔로어는 모두 105만 명으로 일본 트위터러 중 1위, 세계 358위(트위터 카운터 집계)에 올랐다.
특히 동일본 대지진 이후 하루 수천 명씩 팔로어가 늘어나고 있다. 지진 피해자들에 대한 진심 어린 위로와 지원, ‘무능한’ 일본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이 트위터 이용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올린 글에선 “어제는 어느 부대신(한국의 차관에 해당)과 아주 대판 싸웠다. ‘사람 목숨을 도박의 대상으로 하면 안 돼. 바보야’”라며 직설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반면 대지진 발생 직후에는 “피해 지역에 비상식량으로 라면 1만5000개를 보내겠다” “절전을 위해 네온광고를 자제하겠다” “가능한 한 많은 충전기를 보내겠다”며 발 빠른 대응에 나섰다.
그는 또 “지진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에겐 휴대전화를 무료로 빌려 주고 18세가 될 때까지 통신요금도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달 초 “국가가 어려울 때 경제인이기 전에 생명을 생각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며 100억 엔을 기부하자 일부에선 “총리가 돼 주세요”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60대 되면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
재일동포 3세인 손 사장은 1957년 일본 규슈의 사가(佐賀)현에서 네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탄광 노동자로 일본에 왔고,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손 사장이 태어났을 때 그의 가족들은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다.
인생의 전환점은 73년 고교 1학년 때였다. 미국에 한 달간 어학연수를 갔다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이다. 19세기 일본 근대화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동경하던 열여섯 소년은 이때의 충격으로 학교를 자퇴하고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어 미국 고교에 입학했다가 2주 만에 다시 학교를 그만두고 대학입학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그후 2년제 전문대학을 거쳐 UC버클리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유학 시절 정말 죽기살기로 공부했다”는 그는 “밥 먹을 때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아 그릇을 쳐다보며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평생의 이정표가 될 ‘인생 50년 목표’를 세웠다. ‘20대, 이름을 날린다. 30대, 사업 자금을 마련한다. 40대, 큰 승부를 건다. 50대, 사업을 완성한다. 60대,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는 것이다. 유학 중 돈이 필요했던 그는 “하루에 5분씩 발명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특허를 팔아 큰 돈을 벌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자동번역기’로 샤프사에서 특허를 사들여 상품화했고 나중에 전자수첩의 원형이 됐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24세인 1981년 자본금 1000만 엔으로 소프트웨어 유통업체인 소프트뱅크를 창업했다. 초창기에는 자금 부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94년 기업 공개를 계기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특히 95년 적자 기업이었던 미국 야후에 150억 엔(지분율 37%)을 투자한 게 몇 년 뒤 엄청난 성공으로 되돌아왔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사업을 키워나간 손 사장은 2000년 760억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4위의 부호에 선정(미국 포브스 조사, 2011년 81억 달러·세계 113위)되기도 했다. 이후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대규모 적자와 주가 폭락으로 한때 ‘손정의 신화’도 저무는 듯했다. 하지만 2006년 일본 3위의 이동통신 사업자였던 보다폰재팬을 인수하면서 반격의 고삐를 잡았다.
이제 손 사장에게 남은 인생 목표는 ‘60대,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다. 그룹의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인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는 300명의 수강생으로 운영된다. 이미 2만여 명의 직원 중에 200명을 뽑았고, 나머지 100명은 외부에서 선발하기로 했는데 지원자만 1만 명 이상 몰렸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오후 4~5시간에 걸쳐 손 사장에게 직접 교육을 받게 된다. 손 사장은 “‘정보혁명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라는 소프트뱅크의 이념을 공유하는 유망한 인재가 많다”며 “후계자 양성은 1, 2년에 되지 않는다. 10년 이상에 걸쳐 체계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손정의가 19세 때 세운 50년 인생 계획
20대, 이름을 알린다
내 사업을 시작해 그 분야에서 이름을 얻는다
30대, 사업 자금을 모은다
1000억 엔, 2000억 엔 단위 규모여야 한다
40대, 큰 승부를 건다
1조 엔, 2조 엔 규모의 승부를 한다
50대, 사업을 완성시킨다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한다
60대, 다음 세대에 경영권을 넘긴다
후대 경영진이 철학과 사업을 잇게 한다
*60대 목표 위해 후진양성기관인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 설립
◆손정의=재일교포 3세. 17세 때 미국으로 유학, UC버클리대를 졸업했다. 1990년대 초 벤처기업 ‘야후’에 투자해 그 성장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2001년 설립한 소프트뱅크모바일은 현재 일본 3위 통신업체. 소프트뱅크의 현재 총자산은 56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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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②
[중앙일보]입력 2011.09.16 01:32 / 수정 2011.09.16 16:16
창간기획 - ‘뜻을 높게 !’
“미국 큰 땅서 큰 사업가 되겠다” … 고교 자퇴, 퇴로 끊어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 가족·친척·선생님 결국 설득
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 여름, 나는 한 달간 미국으로 영어 연수를 다녀왔다. 눈이 트였다고 할까. 당시 미국은 정말 크고, 힘이 넘치고,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한마디로 빛이 나는 나라였다. 료마는 말했었다. “바다 건너 외국에 가 보고 싶다. 미국에 가 보고 싶다. 유럽을 보고 싶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어떻게든 가보고 싶어 한 곳에 내가 간 거다. 실제로 보니 얼마나 놀랍던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나서 나는 한동안 흥분해 어쩔 줄 몰랐다. 큰 사업가가 되기로 한 이상 난 그 땅에 가야 했다. 사업을 일으킬 뭔가를 찾아와야 했다.
#“10년 뒤를 위해 … 이 맘은 안 바뀝니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직접 써 보내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예상대로 주변의 반대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입원 중이었다. 가정 경제는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친척들은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붙였다.
“인정머리 없는 녀석! 아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마당에 유학이라고? 네 한 놈 잘되자고 가족을 내팽개치냐?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니에요. 국적이니 인종이니, 세상엔 고민만 하는 이들이 널렸지만 난 실제 일본 제일의 사업가가 돼 보이겠어요. 손 마사요시(손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은 누구나 같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어머니는 매일 눈물바람이었다. 할머니도 울며 불며 매달리셨다.
“가지 마라, 마사요시. 거기가 어디라고…. 한 번 가면 못 돌아온다, 가지 마라!”
어머니에게도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아버지는 안 죽는대요. 피를 토하기는 했지만 살 수 있단 말입니다. 앞으로 몇 년, 집안을 생각하면 여기서 착실히 공부해야겠지요. 하지만 몇십 년을 생각하면 가족을 위해서도, 또 제 자신이 뭔가 이루기 위해서라도 인생을 바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전 떠날 거예요. 이 맘은 절대 안 바뀝니다.”
학교에도 직접 자퇴서를 냈다. 마침 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참이라 선생님들의 반대가 컸다. 정 갈 거면 휴학을 해라, 자퇴까지 할 게 뭐냐는 설득을 거듭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전 유약한 남잡니다. 미국에 간다지만 영어를 못 해요.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곤란이 닥치면 좌절하고 마음이 흔들릴 텐데, 그때 돌아올 곳이 있으면 바로 포기할지도 몰라요. 퇴로를 끊지 않으면 어찌 고난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두 내게 졌다. 가족과 친지들은 십시일반, 최소한의 학비와 생활비를 모아줬다.
#할머니 손 잡고 헐벗은 모국으로
미국행이 결정된 뒤 나는 할머니와 마주앉았다.
“할머니, 절 끔찍이 아끼시는 줄 잘 알면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한 걸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한국에 데려가 주세요. 미국으로 가기 전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조상의 나라, 고향 땅을 밟아보고 싶습니다.”
할머니는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을 되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며 더없이 기뻐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한국에 갔다. 2주 정도의 짧은 여행이었다. 조부모님의 고향은 전기도 안 들어오는 대구 인근의 시골 마을이었다. 내놓을 것이라곤 사과밖에 없는 동네. 그마저도 땅이 척박해서인지 알이 조그마했다. 저녁이면 우리는 촛불 침침한 친척집 안방에서 상을 받았다.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차림이었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가져온 헌 옷가지들을 내놨다. 팔꿈치가 닳은 스웨터, 기운 자국이 있는 바지. 그런 것들을 마을 사람들은 한껏 기뻐하며 받아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할머니 얼굴에도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이전부터 할머니는 늘 말했었다.
“우리가 이만치나 사는 건 다 다른 사람들 덕분이데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 때에도 도와 주는 분들이 꼭 있었으이까네. 그라이, 절대 남을 원망하믄 안 된데이. 모두 남들 덕분인 기라.”
그런 말씀들, 또 평생 처음 찾은 모국에서 할머니가 보여준 미소와 행동은 내게 큰 영감을 줬다. 뭔가 큰일, 다른 이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누구인지 도움 받은 상대가 몰라도 좋다. 그저 누군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느끼고 행복할 수 있다면. 당시 깨달음은 내가 몇 년 뒤 ‘정보기술(IT)로 인간을 행복하게!’라는 소프트뱅크의 창립 이념을 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본 땅에 산다고 왜 성을 바꿔야 하나”
잠시 딴 얘기지만, 한국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종종 “모국 생각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1999년 한국에서 첫 기자간담회를 열었을 때도 한 기자가 비슷한 질문을 했다. “마음의 고향이 어디냐”는 거였다. 나는 짧게 답했다.
“제 마음의 고향은 인터넷입니다.”
상대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비록 일본에 귀화했지만 내가 ‘손(孫)’이라는 한국 성을 고수하기 위해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아는 듯했다. 당연히 “한국”이라거나 “모국”이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으리라. 한데 내가 ‘손씨’를 고집한 건 꼭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건 내 ‘자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20년 넘게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단지 내 신체가 속한 국가가 일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그걸 바꿔야 하는가.
난 어디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살고, 묻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할아버지의 고향, 내 존재의 뿌리.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다양성의 나라 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정리=이나리 기자